- 장 마크 발레 <데몰리션> & 도널드 위니컷 '참자기와 거짓자기' - 마침내, 나는 더 이상 혼자 남지 않습니다
- 장 마크 발레 <데몰리션> & 도널드 위니컷 '참자기와 거짓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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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de tour, 우리의 스물세 번째 발걸음이에요.
님은 가끔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 적 있으신가요? 거울 속의 내가 나 같지 않게 느껴지거나 혹은 모든 것이 영화처럼 멀게만 느껴질 때 말이죠. 분명 현실인데도 마치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는 듯한, 이상하고 멍한 감각. 만약 그런 낯선 순간을 경험해보셨다면, 님은 한 번쯤 심리학적으로 '이인증’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인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듯한 감각을 의미합니다. 내 정신, 내 몸, 혹은 그 일부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죠. 하지만 이러한 상태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내가 나 같지 않다”는 말이 추상적으로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말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이 감정을, 꽤나 정확하게 짚어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장 마크 발레 감독의 <데몰리션>(2016)입니다. 제목 그대로 ‘파괴’에 대한 독특한 심리학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인생의 힘든 시기에 떠올리는 작품이기도 하죠. 오늘은 이러한 내면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영화, <데몰리션>에 대해 흥미롭게 살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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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성공한 투자 분석가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두 사람은 사소한 이유로 다투고 있었는데요. 데이비스의 무심한 태도 때문인지, 결국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린 데이비스는 아내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슬픔보다는 배고픔을 먼저 느낍니다. 게다가 병원 자판기에서 초콜릿이 나오지 않자,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쓰기 시작하죠. 어딘가 이상한 데이비스의 행동. 그 스스로도 어딘가 이질적임을 느끼기 시작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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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고도 데이비스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회사에서 일에 몰두하며, 퇴근 후에는 TV를 보다 잠드는 반복된 나날이 이어지죠.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살아가며,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줄리아의 아버지이자 그의 장인인 필(크리스 쿠퍼)을 비롯해 동료들 역시 데이비스의 무심한 태도에 당혹감을 느끼죠.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고 직전, 줄리아는 2주째 물이 새는 냉장고를 고쳐달라며 불평을 했고, 데이비스는 필이 예전에 해준 말을 떠올립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해보고 중요한 게 뭔지 알아야 해."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냉장고를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뜯어보기 시작합니다. 고장 난 회사 화장실 문짝부터 오류가 난 사무용 컴퓨터까지. 데이비스는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일상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나가죠. 이런 행동에 장인은 걱정을 느끼고, 정신과 상담을 권하거나 휴직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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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의 고객 상담사 카렌(나오미 왓츠)과 연락이 닿게 됩니다. 그는 일전에 단순한 환불 요청을 넘어, 아내를 잃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자신의 상태를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요. 그 편지를 읽은 카렌이 “편지를 읽고 울었어요. 얘기할 사람은 있나요?”라며 전화를 건 것이 그들의 시작점이었죠. 이후 두 사람은 연애감정보다는 서로에게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 관계로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카렌의 남편이 해외로 떠나자 데이비스는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되고, 까칠한 사춘기 아들 크리스와도 점점 가까워집니다. 크리스와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심지어는 분해하는 것을 넘어 크리스와 함께 자신의 신혼집을 부수며, 그는 감정이 살아 숨 쉬는 삶을 조금씩 되찾아갑니다. 과연 데이비스는 모든 것을 부순 끝에,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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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몰리션>은 감정의 붕괴라는 소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독특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은 평소 감정의 진정성을 영화 속에 섬세하게 담아내는 연출가로 평가받아 왔는데요. 그런 그가 202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며, <데몰리션>은 영화로서는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창의적인 연출력과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배우에게 연기적 자유를 허용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는데요. 덕분에 <데몰리션> 또한, 주연을 맡은 제이크 질렌할은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연기”라는 호평을 받았고, <데몰리션>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곤 합니다.
특히 질렌할이 연기한 데이비스라는 인물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음에도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너무도 담담한 태도에 일각에서는 그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너무 깊이 감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도 그 감정을 찾아내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억눌러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데이비스는 사랑을 진심으로 느꼈던 인물이기도 하죠. 상처는 반드시 눈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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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요. 데이비스가 보여주는 이 감정의 무감각은, 종종 현대인의 공허함과 겹쳐 읽히곤 합니다. 차가운 도시 속에서 진심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거짓된 얼굴을 쓰고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는 모습이 어쩐지 데이비스와 겹쳐 보인다는 것이죠. 또한 영화를 본 관객들 중에는 데이비스가 자신의 집을 부수는 장면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허물어야만 비로소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감정, 그리고 그 파괴의 행위가 곧 감정 회복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데몰리션>은 매우 이례적인 감정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파괴를 통해 감정을 회복하는 독특한 여정을 그리는데요. 데이비스가 겪는 감정의 혼란과, 그가 점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만한 심리학 이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위니컷의 참자기와 거짓자기 이론(True self and false self)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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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몇 가지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나요? 우리는 언제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는 거리가 먼 누군가를 연기하듯 살아가야 하죠. 바로 이 지점이 위니컷의 ‘참자기와 거짓자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도널드 위니컷(Donald Woods Winnicott)은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입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확장한 인물이죠.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리비도에 집중했다면, 위니컷은 ‘자기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통합’에 주목했습니다. 즉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신체를 활용해 감정을 주고받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를 형성한다는 것이죠. 위니컷은 이 과정을 ‘인격화’(personal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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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격화의 핵심 시기를 유년기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대상은 대개 어머니이기 때문이죠. 위니컷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돌봄이 지속될 때, 아이는 자신만의 ‘최초의 자기’를 형성합니다. 바로 '참자기’입니다. 참자기는 인간 존재의 핵심입니다. 참자기를 바탕으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죠.
반면, 어릴 때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외부 환경에 의해 자주 침범당하면, 아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방어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거짓자기’입니다. 거짓자기는 외부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아입니다. 일종의 눈치이자 적응을 위한 껍데기죠. 문제는 이 거짓자기가 너무 일찍 형성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자기는 어디까지나 실제로 느껴지는 자기가 아니기에, 어른이 되어도 자신의 삶을 실감하지 못하고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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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컷은 아이가 자신만의 참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가지 경험을 말합니다. 바로 전능성의 경험과 공격성의 표현 그리고 중간영역의 탐색입니다. 출생 직후의 아이는 자아가 통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신과 어머니를 하나로 느끼며, 돌봄을 외부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냈다’고 믿죠. 예를 들면, 배가 고파 울면 젖이 생겨나는 것처럼 느낍니다. 위니컷은 이 과정을 전능성(omnipotence)의 경험이라 부릅니다. 아이는 세상이 자신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믿으며, 이 환상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곧 환상을 깨뜨립니다.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만으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외부 세계에 관심을 표현하게 되는데, 그 방식이 바로 공격성(Aggression)입니다. 태아 시절의 발차기, 생후의 젖 빨기, 장난감을 던지는 행위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죠. 위니컷은 공격성을 단순히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신체를 활용해 에너지를 쏟는 방식이자 본능’으로 해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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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Woods Winnicott, 1896–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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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어머니의 태도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공격성을 통제하거나 거부하면, 아이는 자신을 숨기고 거짓자기를 만들게 되는데요. 반대로 공격성을 억누르지 않고 아이를 충분히 안아주면, 아이는 자신이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안정감을 얻습니다. 이러한 공격의 시기를 잘 지낸 아이는 어느 순간, 관심의 대상을 어머니에서 곰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위니컷은 이를 중간영역(Transitional Space)이라 부릅니다. 이곳은 현실과 환상,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놓인 심리적 공간입니다. 환상에서 외부로 나아가기 전, 완충 역할을 하는 구간이라고도 볼 수 있죠.
아이에게 이 물건들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어머니의 대체물’로 인식됩니다. 아이는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물고 던지고 부수며 공격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부숴지지 않자, 그들이 환상이 아닌 외부의 독립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위니컷은 이 과정을 대상관계(object-relating)라고 했고, 비로소 그들을 스스로 다루기 시작하는 단계를 대상사용(use of object)이라 불렀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점차 외부 세계를 향한 흥미를 넓혀갑니다. 중간영역에서의 반복적인 경험은 문화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되며, 참자기로 나아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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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니컷의 참자기와 거짓자기 이론은 <데몰리션> 속 데이비스의 심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영화 상에서 그가 부모와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작중 그의 행동 양상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충분한 돌봄을 받지 않아 거짓자기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죠. 위니컷은 거짓자기가 강한 사람일수록 극단적인 상황에서 감정을 유연하게 처리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들은 평상시에도 산만함과 무기력함에 시달리며, 삶을 ‘연기하듯’ 살아간다고 했죠. 데이비스는 아내의 죽음을 겪으며 이러한 거짓자기의 붕괴를 경험합니다. 그는 충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합니다. 마치 일종의 이인증 증상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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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은 아내가 사망한 교통사고 직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중간중간 장면을 통해 데이비스의 과거를 퍼즐처럼 보여줍니다. 그는 아내 줄리아에게 늘 무관심했고,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반응해왔습니다. 그녀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죽기 직전 남긴 그녀의 메모도 “바쁜 척 좀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라는 것이었죠. 또한 데이비스는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출근길에 만난 남자에게 자신의 직업을 속이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그는 아내, 장인, 동료 누구에게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적당히 반응하고, 적당히 기대에 맞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맞춰 다정한 남편, 유능한 사위이자 직원의 삶을 의탁해 살아왔었죠.
이런 그에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상실’이라기보다 ‘혼란’으로 다가옵니다. 감정적으로 진심을 나눈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부재를 곧장 결핍이나 상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는 종종 현실을 부정하고, 환각을 경험하며, 매미나방이 자신의 심장을 파먹는다는 망상을 품습니다. 이러한 데이비스의 심리는 더 이상 이전의 거짓자기가 기능을 못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돌봄받지 못한 시기로 퇴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유년기에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환상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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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컷은 거짓자아에 갇힌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치료자가 ‘좋은 어머니’의 역할을 대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릴 적 자신이 밀려난 자리, 그 빈 공간을 다시 채워줄 수 있는 타자를 만날 때 비로소 참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영화 <데몰리션>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카렌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완전히 낯선 타자인 그녀는 데이비스에게 치료자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데이비스는 매우 미성숙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털어놓기 바빴고, 때로는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응대했는데요. 하지만 카렌은 그런 그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혼란을 이해하려 애쓰며,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이 머물던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하죠. 바로 그 지점에서 위니컷이 말한 ‘지탱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구현됩니다. 충분히 받아주는 타자 안에서 데이비스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신을 숨기기만 하던 이전의 모습에서 벗어나 점차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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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카렌보다 더 중심에 위치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녀의 아들, 크리스입니다. 위니컷의 이론에서 말하는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공간, 즉 중간영역에 가까운 존재죠. 데이비스는 크리스와 함께 있는 동안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총을 들고 장난을 치고, 락 음악을 듣고,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죠. 이 관계는 단순한 친밀함을 넘어, 위니컷이 강조한 ‘놀이’의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위니컷은 놀이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참자아가 살아나는 생생한 활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중간영역에서 공격성을 넘어 “놀이에 이르게 되고, 놀이에서 공동의 놀이로, 그리고 결국 문화적 경험으로” 나아갑니다. 데이비스의 이상행동은 겉보기에 공격성처럼 보이지만, 크리스와 함께일 때 그것은 놀이의 형태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타인과 감정을 나누고, 점차 자신의 진짜 모습을 회복해 갑니다. 참자아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하나의 놀이처럼 시작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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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영화 <데몰리션>은 주인공 데이비스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 안에 자리했던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참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중심에는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연대의 힘이 놓여 있죠. 데이비스가 줄리아와 함께 살았던 신혼집을 직접 부수는 장면은 그 상징성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집을 허물려던 그는 그 순간, 처음으로 크리스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밉니다. 혼자 주변의 물건들을 분해하는 것에 열중했던 과거와는 또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그들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듯이, 천진난만하게 데이비스의 세련된 집을 파괴합니다. 그의 삶에 팽배했던 소속감은 없어지고 연대감이 살아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위니컷이 말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건강한 자아’가 영화 안에서 실현되는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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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선을 확장해 보면, <데몰리션>은 단지 데이비스 혼자만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데이비스를 치유해주던 카렌과 크리스 또한, 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만의 참자아를 발견해 나갑니다. 사실 카렌과 그녀의 아들 크리스 또한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결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카렌은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우울 속에서 약물에 의지해왔고, 정신과 약이라 말했던 약들은 사실 자의적으로 조합한 약물이었습니다. 크리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흡연을 하고, 민감한 주제도 거리낌 없이 말하며 때로는 자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는 데이비스에게 “내가 게이인 것 같아”라고 말하며 혼란 속에서도 자기 감정엔 정직한 모습을 드러내죠. 그런 점에서 데이비스와 크리스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솔직함을 택하는 이 두 인물은 서로에게 거울 같은 존재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립된 두 사람은 점차 서로를 통해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가죠.
그러나 그들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영화 후반부, 크리스는 또래 남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오며, 카렌의 남편에게 데이비스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까지 겹칩니다. 이때 병실 앞, 울먹이며 크리스를 바라보는 카렌은 말합니다. “다시는 누가 널 때리게 하지 않을 거야. 나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고. 난 네가 숨김없이 당당하길 바라. 엄마가 더 잘할게. 약속해.” 이 진심 어린 말은 크리스뿐 아니라 데이비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둘의 모습을 보고 난 후, 데이비스는 자신이 여지껏 진정으로 받고 싶었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제야 줄리아를 사랑했음을, 그리고 그 상실이 자신을 얼마나 무너뜨렸는지를 비로소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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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데이비스는 더 이상 분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줄리아의 유산으로 장학금 재단을 만들려는 시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아이들을 위한 회전목마를 다시 세우는 일을 택합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이죠. 낡은 놀이기구를 고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의 손끝이 분해가 아닌 복원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영화의 마지막, 데이비스는 아이들과 함께 달립니다. 어릴 적 누구보다 빨리 뛰고 싶었던 마음을 그동안 꾹 눌러온 채 살아온 그가, 이제야 그 욕망에 솔직해진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숨차게 달리고 있다는 것. 이제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솔직하되,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겠죠. 그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맺힙니다. 마침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사람의 얼굴. 님은 그 얼굴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알고 싶네요. 님은 어떤 욕망을 마음속에 오래 감춰두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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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Demolition Movie CLIP - I'm Just Swinging Through (2016) - Jake Gyllenhaal Movie HD,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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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데몰리션>에서 명장면을 꼽으라면 어떤 장면을 고르실 건가요? <데몰리션>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단연 데이비스가 길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무감각했던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 장면은, 사실 굉장히 슬픈 장면이기도 하죠. 많은 이들이 음악에 심취한 우스운 장면처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억눌렸던 감정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데몰리션>은 이렇게 가볍게 소비될 수 있는 장면 속에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주제들을 서사적으로 잘 풀어냈다고 볼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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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주변의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해 두 가지 존재 방식을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손안에 있음’(Zuhandenheit)과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이죠. 그는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늘 ‘사용’하면서만 관계 맺어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망치를 쥐고 못을 박을 때, 그 행위에만 집중할 뿐 망치 자체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망치는 ‘손안에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망치가 고장 나면,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낯선 존재로 다시 보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를 ‘눈앞에 있음’이라 정의했습니다. 익숙한 것이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본질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 데이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내 줄리아를 그저 평범한 삶에 필요한 존재로만 여겼고, 진짜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야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죠. 냉장고, 컴퓨터, 집. 이전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낯설게 마주하고, 하나씩 분해해나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물의 껍데기를 걷어내며 그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줄리아가 죽은 이후, 요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은유”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 시점부터 <데몰리션>은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가 행하는 작업들은 단순한 ‘분해’에서 점차 ‘열림’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니까요. 즉 <데몰리션>은 익숙한 것을 해체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다시 조립해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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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데몰리션>이 영화라는 예술 매체를 통해 전달하려는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 작업, 즉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데몰리션>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데이비스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살면서 놓치고 지나쳤던 숨겨진 의미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님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의 우회로를 뜻하는 de tour Newsletter처럼, 님 역시 <데몰리션> 혹은 이 글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겠죠. 그러니 다시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님은 어떤 감정부터 해체해보고 싶으신가요? 님이 예술을 통해 발견하고 싶은 새로운 의미는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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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de tour 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님은 일상 속에서 낯선 순간을 마주친 적 있으신가요? 이를테면 자주 지나던 길이 공사 중이라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늘 보던 풍경이 문득 다르게 보인다거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어딘가 이질감을 느낄 때처럼요.
이런 순간마다 우리는 익숙하던 삶이 조금 어긋난 것 같은 기분을 받습니다. 별것 아닌 장면에도 엉뚱한 감상이 떠오르고,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오늘 함께 살펴본 <데몰리션>처럼, 그런 감각이야말로 주변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만들고, 새로운 감정을 길어 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님은 그 누구보다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언제나, 그런 조금 다른 시선에서 시작되니까요. 님은 오늘, 어떤 낯선 장면에서 멈춰 섰나요? 하단의 ' 피드백 하러 가기 ' 버튼을 눌러 여러분의 소중한 감상과 의견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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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an Marc Vallee, <Demolition>(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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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rected by: Jean Marc Vallee
- Written by: Bryan Sipe
- Distributed by: Black Label Media, SKE, Mr. Mudd, TSG Entertainment
- Cast: 제이크 질런홀, 나오미 와츠, 크리스 쿠퍼, 주다 루이스 등
- Running Time: 1h 41m
- OTT Service: Watcha | TVING | Apple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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