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 사회 정체성 이론 - 아파트는 우리가 건설한 욕망의 집합체이다
-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 사회 정체성 이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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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본 컨텐츠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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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de tour, 우리의 다섯 번째 발걸음이에요.
님은 ‘아파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파트. ‘치킨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있기 전, 사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러한 아파트에 대해 흥미롭게 풀어낸 영화로는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를 손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한국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새 지평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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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화 시작부터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서울을 비추며 시작됩니다. 모든 건물과 도로가 무너진 한겨울의 서울. 그러나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가 거주하는 ‘황궁 아파트’만은 우연히 대지진을 피하고 굳건히 서있었는데요. 근처의 생존자들도 하나 둘 홀로 우뚝 세워진 아파트를 찾아오며, 황궁 아파트는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죠. 그러나 황궁 아파트 내부의 사정은 그리 넉넉지는 않았는데요. 더 이상 정부나 기관들의 도움을 구하지도 못하고, 외부와의 통신도 단절된 아파트는 아포칼립스 그 자체였는데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리셋”된 세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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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민성은 우연히 1층에서 벌어진 방화 사고를 목격하게 되는데요. 그때 영웅처럼 나타난 영탁(이병헌). 그의 노력으로 다행히 불은 더욱 퍼지지 않고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는데요. 사실 앞선 방화 문제가 외부인과 입주민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된 방화 사건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죠. 이로 인해 입주민들은 회의를 열어, 외부인의 수용을 문제로 투표를 진행합니다. 결과는 압도적으로 외부인들의 퇴출을 가리키고 있었죠. 결국 입주민들은 가장 큰 희생정신을 발휘한 영탁을 주민 대표로, 그를 도와 진화를 도운 민성을 자경단으로 임명하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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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무력으로 외부인들을 내쫓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며 크게 환호하는데요. 이어 원래 외부인들을 퇴출시키기 위해 설립된 조직을 완전히 입주민 공동체의 형태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정비 사업 그리고 식량을 찾는 등의 생존 목표를 위한 것이었죠. 이렇게 초라하더라도 어느덧 어엿한 사회의 형태를 갖추는 황궁 아파트의 ‘아파트 주민 자치 위원회’. 새로운 세상 그리고 사회에 맞는 규칙도 세웠는데요. 바로 주민 수칙 제1원칙,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며, 주민만이 살 수 있다”. 제2원칙, “주민은 의무를 다하되, 배급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였죠. 과연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큰 어려움 없이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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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는 재난 영화라는 영화의 특성 때문인지, 코로나19가 끝날 무렵 개봉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은 작품입니다. 원래 재난 영화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들은 재난 이후에 겪는 등장인물들의 고난과 성장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등장인물 개개인보다는, ‘아파트’라는 하나의 시스템에 집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었죠. 더불어 관객들도 “나도 저 상황에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스스로 이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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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인터뷰를 통해 엄태화 감독은 “최대한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연출하려 노력”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배경 탓에 인물들은 영화라는 가상공간임에도, 마치 현실처럼 반응하고 깊이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이로써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에 더욱 쉽게 이입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신의 주관에 따라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제각기 다르게 내리게 되었죠.
그중 극단적으로 의견이 나뉘는 인물 중 하나로는 황궁 아파트의 중심, ‘영탁’이 있는데요. 작중 영탁은 가장 선악이 모호한 인물입니다. 영탁의 본명은 사실 ‘세범’입니다. 자신에게 사기를 친 영탁을 홧김에 살해하고, 주민들에게 자신을 ‘영탁’으로 소개하죠. 따라서 그를 카리스마 넘치는 주민 대표인 ‘영탁’, 혹은 살인자인 ‘세범’으로 보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죠. 심지어 영화 결말에 이르면 세범이 자기 자신을 ‘영탁’으로 호소하며, 인물 정체성의 구분은 더욱 애매모호 해지는데요. 그만큼 ‘세범’으로써의 자기 자아를 잃어버리고, 주민 대표인 ‘영탁’에 몰입해 있었다고 볼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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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탁은 왜 자기 자신의 신원을 바꿔 말할 만큼, 주민대표라는 역할에 끝까지 몰입해 있었을까요? 이러한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회 정체성 이론은 헨리 타즈펠과 존 터너가 1960-70년대에 개발했는데요. 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사실 우리의 정체성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나’, 부모님의 자식으로서의 ‘나’ 등. 어릴 적부터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죠.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을 만날 때,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사회 정체성’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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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스스로 특별한 감정과 가치를 매기는 정체성을 말합니다. ‘개인 정체성’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을 뜻한다면, ‘사회 정체성’은 집단과의 관계 속에 형성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점차 변화할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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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크게 영탁이라는 권력자의 탄생으로부터 몰락의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탁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명이 뚜렷합니다. 작중 영탁은 가장 주민으로써의 정체성이 확고한 인물인데요. 따라서 황궁 아파트가 가진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민회의 합리성과 폭력성이죠. 이렇듯 그가 가장 ‘주민회’스러운 행동을 보이게 된 배경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본래 영탁의 신분, 비주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주민 그리고 살인자라는 개인 정체성을 선택하기보다는, 황궁 아파트 주민 대표라는 사회 정체성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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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탁은 영화 후반부에 주민이 아니었음이 밝혀지자 주민회로부터 배격 당합니다. 심지어 ‘외부인들의 공격’에 대한 책임자로 몰려, 주민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죠. 비주민인 개인 정체성을 트집 잡아, 집단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영탁만큼 주민회에 헌신적이면서 공로를 세운 인물은 없습니다. 더구나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정체성도 그가 맨 처음 제시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폭탄을 맞아 죽을 때까지도 ‘진짜 영탁’의 집에 돌아와 최후를 맞이하는데요. 이때 치매에 걸린 ‘진짜 영탁의 어머니’가 가짜 영탁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장면은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회 정체성 이론에서 집단에서의 익명성은 사회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즉 영탁의 주민대표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영탁’이라는 익명성에 근거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익명성을 통해 얻어낸 권력에 ‘세범’이라는 자신의 원래 정체성을 잃고, 오직 집단을 위해 폭력까지 저지를 수 있는 화신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그를 더욱 죽음의 길로 내몰게 되었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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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인물들의 행동은 사회 정체성 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중 영화의 주인공인 민성과 명화는 부부임에도, 그들의 대척점이 명확한데요. 평범한 소시민을 상징하는 인물인 민성의 경우가 현실에 타협하며 다수 집단에 순응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면, 명화의 경우는 사회 정체성에 휩쓸리지 않고 도덕심에 의해 행동하는 일탈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서로 다른 제스처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인들의 판이한 반응들을 상징하는 셈이죠.
한편 부녀회장인 금애는 황궁 아파트의 시스템에 기생하며 가장 많은 혜택을 얻어 가는 인물입니다. 영화 후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잃게 되는데요. 이에 영탁에게 책임을 물라고 하자, 오히려 영탁은 “네 아들이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을 잘도 받아먹더니”라며 따져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영탁의 대사는 주민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금애는 일종의 재산이었던 아들을 자경단으로 내몰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즉 한 아이의 어머니인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사회 정체성에 의존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사적 재산인 아들을 잃자, 개인 정체성으로 돌아와 집단에 항의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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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그러면 사람들은 왜 사회 정체성을 가지려 노력할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죠.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구인지, 타인은 누구인지, 나는 무리 속에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배고픔 혹은 두려움 등을 느끼는 특정한 상황 속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죠. 이럴 때 사회 정체성은 우리를 확실히 만족시켜줄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현재 속한 사회에 더욱 안정감을 느낄수록, 우리는 집단에 대한 충성과 애착을 더욱더 느끼게 되고, 사회가 부과한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사회 정체성의 형성 과정은 집단 내에서만 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정체성은 우리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 즉, 외집단과의 차별점을 찾아내 비교함으로써 더욱 강화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을 ‘자기 범주화’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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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초반부터 사회 정체성을 가지기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기존의 국가 시스템은 무너졌고, 우리 삶을 지탱하던 전기 공급과 통신망은 이미 먹통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한겨울인 탓에 식수와 식량도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마당에, 몰려드는 외부인들로 인해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러한 감정들은 이기심으로 변질되기 쉬웠죠. 특히나 초반에 일어난 방화사건이 주민들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이기심을 더욱 촉발시켰습니다. 따라서 주민들은 “오직 주민만”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며, 작은 군대와 같은 자경단을 꾸리고 아파트 주변으로 방벽을 만들어 외부를 배척하는 선택을 내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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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심지어 폭력으로 이어지는데요. 영화 중반, 자경단을 앞세워 외부인들을 도와준 주민들을 색출해 내는 장면은 이들의 폭력성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주민들은 노부부를 포함해 외집단에 우호적인 주민들을 모아, 한겨울에 광장에 무릎 꿇고 사죄할 것을 명령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낙인까지 찍어두는 일을 공식적으로 행하죠.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내집단의 사회 정체성의 본질을 흐리는 인물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집단 내 사회에 갖는 충성도가 낮은 인물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과 위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전략인 것이죠.
이렇듯 외집단의 열세를 통해 자존감을 채우는 ‘자기 범주화’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집단 이기주의를 야기합니다. 집단 이기주의란 특정 집단이 전체의 이익이 아닌, 자기 집단만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사회현상을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외부인들을 ‘바퀴벌레’로 통칭하고는, 자신들은 “선택받았다”라는 주민들의 행태는 이러한 면모를 극단적으로 드러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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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님, 과연 황궁 아파트는 아파트 이름처럼 대지진이라는 전무후무한 재난 상황에 따뜻한 유토피아가 되어주었을까요? 아니, 애초에 완전무결한 유토피아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황궁 아파트는 해당되지 않았나 봅니다. 영화 후반, 영탁의 죽음과 함께 외지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황궁 아파트의 주민회는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죠. 주민회의 제2원칙, ‘차등 분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민 한 명이 외부인들과 내통한 결과인 것이죠. 아파트 주민들은 사실상 명화를 제외한 모든 인원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것은 예고된 것, 아니 영화 내내 전개되던 흐름의 연장선일 수 있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들을 퇴출시키고 싶은 욕구는 무력을 동반했고, 다시 한 명의 주민이 외부인들이 가진 복수심에 공감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야기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또 다른 개인의 이기심을 무너뜨리는 생리와 같은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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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신 분들은 아마 눈치채셨을 겁니다. 영화가 후반으로 진행할수록, 주민들에게 어느덧 “오직 주민들만의 것”이라는 구호는 사라지고, 오로지 ‘아파트를 위해’라는 말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의 초점은 자신들, 즉 아파트 안에 삶을 꾸린 사람들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아파트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사수하는 것만이 큰 과업으로 남게 되었죠. 이것은 어떠한 희생정신이나 생존 욕구가 아닙니다. 일종의 환상. 세상 유일하게 높은, 수직으로 쌓인 모래성과 같은 ‘황궁 아파트’. 그것이 주는 거대한 권력과 자기만족감을 지키기 위해,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고야 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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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에는 마치 진짜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듯한 조직이 등장합니다. 황궁 아파트에서 벗어난 명화가 만나게 된 새로운 공동체 그룹이죠. 그들은 앞선 황궁 아파트와는 여러 측면에서 대립됩니다. 우선 명화에게 따듯한 밥 한 줌을 쉽게 내줄 수 있는 그룹이었죠. 명화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을 이행할 수 있는 도덕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살아가는 터전도 황궁 아파트와 달리, 무너져 수평으로 뉘어져 있는 아파트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밝은 얼굴을 짓고 있습니다. ‘지옥’. 그전까지 황궁 아파트의 사람들이 외부를 바라보던 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황궁 아파트로부터 멀리 도망친 명화의 눈에는 지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이고, 유토피아란 무엇일까요? 그녀는 어디에 있었고, 지금은 어디에 도착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명화의 답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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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영화는 비단 재난 상황의 것만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아파트 공화국에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따라서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나, 시작과 동시에 주민들은 ‘주민회’라는 강력한 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개인들의 이기심에 의해 사회가 무너지고 다시 혼란 상태가 되어버린 사회를 조명합니다. 그 이후 결말에는 명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로의 귀환을 암시합니다. ‘아노미’라는 말은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무법, 무질서 상태를 뜻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노미와 사회 형성이 무한히 순환하는 구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동력으로는 사회로부터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개인들의 심리를 손꼽을 수 있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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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tube, [콘크리트 유토피아] 메인 예고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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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순환구조는 우리에게 색다른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 모두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습니다. 사회 속 모두가 노력한다면, 세상은 더욱 나아질 것이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세상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굳이 굳이 이전의 사회를 상징하는 콘크리트 아파트로 돌아오고 이전의 과오를 반복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껴있지만, 영화 속 사회는 현재 우리 사회의 데칼코마니와 같습니다. 영화 결말에 명화가 찾아낸 그룹은 이전 황궁 아파트보다는 더욱 긍정적인 것처럼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 그룹 또한 황궁 아파트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곳은 진짜 유토피아가 될 수 있겠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실 열린 결말입니다. 마지막 새로운 그룹에서 빛을 발견했다면, 영화를 통해 보다 밝은 우리들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결말이 끝없는 반복으로 이해된다면, 영화는 새드 엔딩으로 읽힐 수 있겠죠.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명화가 찾아낸 수평으로 뉘어진 아파트 그룹은 유토피아와 같은 사회일까요? 피드백 하러 가기 를 통해 의견을 전달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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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de tour의 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님, 님은 어디에 살고 계신가요? 혹시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고 계시진 않나요?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내 집 마련의 꿈을 꾼다면, 무의식적으로 응당 아파트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했었습니다. 우리는 아파트를 욕망하고, 아파트는 그러한 우리를 규정시키고 재생산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삶은 일관적으로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치열한 경쟁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님이 꿈꾸는 집은, 그리고 가족의 형태는 어떠한가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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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rected by: 엄태화
- Written by: 이신지, 엄태화 /김숭늉(원작)
- Distributed by: Climax Studio, BH ENTERTAINMENT
- Cast: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
- Running Time: 2h 9m
- OTT Service: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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