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 반 고흐 & 메를로-퐁티 '살' 존재론 - 그의 노란색은 세계의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 빈센트 반 고흐 & 메를로-퐁티 '살' 존재론 - |
|
|
님과 de tour, 우리의 스물여덟 번째 발걸음이에요.
님, 이런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만약 님이 예술가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실 건가요? 생전에 적당한 인기를 누리며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일까요, 아니면 평생을 무명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위대한 명작을 남겨 사후에야 인정받는 예술가일까요?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흔한 질문인데요.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앞의 두 선택지 중 어느 것도 이루기 쉽지 않습니다. 생전에 인기를 누리는 예술가가 되려면, 대단한 작품을 창작하고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죠. 하물며 후자는 더욱 어려운 길입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포기한다는 건,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사후에야 인정받은 예술가'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죠. 세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흐는, 그 화려한 명성과는 정반대로 평생을 비극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고흐의 삶을 색다르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
|
|
1853년 네덜란드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 흐로트쥔데르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하지만 이 이름에는 묘한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정확히 1년 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형의 이름 역시 빈센트 반 고흐였거든요.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 상황은, 그의 삶 전체에 드리운 그림자를 생각해보면 마치 운명의 전조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가 평생에 걸쳐 자신과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 것도, 이 기묘한 출발점과 무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빈센트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습니다. 16세에 삼촌의 구필화랑에서 일하며 예술과 가까운 삶을 살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성직자의 꿈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
|
|
The Sower, oil on canvas, 64 cm x 80.5 cm, 1888 |
|
|
그런데 그가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자 교구에서는 극단적이라며 그를 해고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고흐에게 오히려 전환점으로 다가왔습니다.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그들을 그림으로 그리겠다"며 화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그의 마음 속에 한 여성이 들어서게 되며 시작되었습니다. 과부였던 사촌 케이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그녀에게 고백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가족과 불화를 겪으며 고향을 떠나 헤이그와 파리를 전전하게 되죠.
|
|
|
Self-Portrait with Ear Bandaged Ear, oil on canvas, 60 cm x 749cm, 1889 |
|
|
이후 우울증과 도시 생활에 지친 시기를 보내던 고흐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폴 고갱이었습니다. 평소 고흐는 자신의 동생 테오의 소개로 모네, 조르주 쇠라 등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우했었는데요. 마침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날 계획을 세우던 고흐는, 고갱에게 독자적인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를에서 노란 집을 빌려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2개월 동안 사사건건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유명한 사건이 터졌죠. 고갱과의 격렬한 말다툼 끝에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낸 것입니다.
고갱과의 단절 이후, 고흐는 정신 분열 증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주민들의 탄원으로 아를의 노란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리 근교로 이주해 의사 폴 가셰 박사의 간병을 받게 되었지만, 불안과 절망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1890년 7월 27일 저녁, 고흐는 밀밭에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계속 의존해야 하는 죄책감과 자신을 실패한 인간이라 여기는 절망감 때문이었죠. 이틀 후, 고흐는 테오의 품에서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비극적이지만 치열했던 생이었죠.
|
|
|
님은 따로 좋아하는 미술가가 있으신가요? 정말 다양한 미술가들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한국인이 사랑하는 미술가 순위를 매기자면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빈센트 반 고흐죠. '색채의 미술가'이자 '노란색의 구도자'라고 종종 불리는 고흐는 생전에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흔히 말하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인물인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미술가로서 그의 활동기간은 겨우 10년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그림 기법을 탐색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본격적으로 창작에 열중한 기간은 6년 남짓에 불과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세기에 길이남을 걸작들을 탄생시킨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사실 미술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고흐에게는 그다지 큰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주변과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자주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 중 "세상에는 믿고 사랑할만한, 가치 있는 것들이 많지"라는 문장은 그가 얼마나 세상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
|
|
Sunflowers, oil on canvas, 95 cm x 73 cm, 1889
|
|
|
이러한 모습은 그가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전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당히 고집이 세고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실상은 외로움과 우울증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가족들을 비롯한 아버지, 그간 사모했던 여인들, 어디선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신께까지도. 심지어는 자신을 시기했다고 추정되는 고갱에게도, 항상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했죠.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마음이 실패로 끝나자 좌절한 한 청년. 어쩌면 고흐의 천재성은 바로 그러한 비극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흐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추측들도 많습니다. 고갱과의 관계, 그가 앓던 정신병과 죽음의 진실은 지금도 미술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죠. 그만큼 그의 삶은 마치 파란만장한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습니다. 불안과 희망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강렬하게 타오르던 삶과 같았죠. 그렇기에 그가 남긴 작품들이 세기를 대표할 작품이라 평가받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불완전하고 역동적인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가 결국 그의 손에서 탄생한 예술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고흐의 작품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흥미로운 이론적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살'(la chair) 존재론이죠. |
|
|
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 |
|
|
님은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의 첫인상을 믿는 편이신가요?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와 직접 대화해보기 전에, 그 사람의 인상이나 관상만 보고 먼저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상대가 생각보다 괜찮고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죠. 그러면서 첫 판단은 점차 머릿속에서 지워져갑니다. 이는 메를로-퐁티가 속한 현상학의 개념과 매우 맞닿아 있습니다. 현상학은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이 이성에 의해 모든 세계를 재단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직관을 통해 세상의 근본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 철학 사조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본체'라 하고, 그에 대한 경험을 '현상'이라고 불렀죠.
우리는 보통 세상을 살아가며 각 본체들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삶을 살아가면서 각 본체의 본질을 파악하고 살아간다고 여기죠.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런 생각이 적절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는 지각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살면서 보고 느끼는 것은 모두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현상 안에서 선입견을 배제하고 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
|
이렇듯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강조한 메를로-퐁티는 자연스럽게 세계를 감각하는 몸 자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메를로-퐁티에게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은 철저히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몸을 통해 세계 속의 모든 대상들과 관계를 맺죠.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나아가 그들을 보고 소통하며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과 세계가 나누는 감각이야말로, 살아있는 현실의 표면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메를로-퐁티의 '살(chair)' 존재론이 시작됩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모든 순간에서 일종의 '살'이 작동한다고 봤습니다. 이 살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감각하고, 관계를 맺으며, 타인의 존재를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때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말로 대화하기보다, 스킨십을 통해 보다 더 깊은 관계를 쌓기도 합니다. 퐁티의 살 개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의 접촉은 단순히 물리적 접촉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근본적인 소통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
|
|
The Potato Eaters, oil on canvas, 82 cm x 114 cm, 1885
|
|
|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은 몸의 감각을 통한 존재 방식에 주목하며,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몸을 열린 공간으로 바라보았는데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퐁티는 우리 몸의 이중감각을 설명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할 때, 나는 타인의 손을 잡고 흔들지만, 동시에 그의 손에 의해 내 손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만짐과 만져짐이 동시에 일어나고, 감각함과 감각당함이 하나의 순간에 공존하게 되는 것이죠. 흥미롭게도 악수하는 상대방 역시 똑같은 경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과연 누가 주체인지 객체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워지죠. 메를로-퐁티는 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감각 속에 교차되어 들어가는 구조를 키아즘이라 불렀습니다. 본래 키아즘(chiasme)은 그리스어로 '교차적으로 얽혀있다'는 의미로서, 두 선이 서로 얽혀있는 희랍어 철자 x(키)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살들은 이러한 키아즘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존재는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키아즘의 양상은 고흐의 작품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대표적으로 고흐의 초기작 <감자먹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가 스스로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고 여긴 이 작품에는 끈끈하면서도 어딘가 지친 농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고흐는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농부들의 손이었죠. 감자를 캐기 위해 직접 흙을 팠던, 그리고 그 감자를 먹고 있는 농부들의 거친 손들. 어쩌면 세상에서 감자에 가장 친숙한 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농부들의 손은 어느덧 감자가 되고, 감자는 그들의 손이 되는 모호한 존재로 변화합니다. 마치 살을 공유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
|
|
Shoes, oil on canvas, 38.1 cm x 45.3 cm, 1886 |
|
|
또한 메를로-퐁티는 살의 교차로 인한 소통 방식은 기존의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으로는 그저 사물의 형상이나 공간 등만 파악할 수 있다면, 살은 이 뿐만 아니라 사물의 관계성이나 느낌 등 보이지 않는 것(l‘nvisible)들을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했죠. 이는 많은 철학자들이 사랑하는 고흐의 또 다른 작품, <구두 한 켤레>를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림 속 구두는 그 주인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꽤나 고단한 삶을 살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앞선 <감자먹는 사람들>에서 고흐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감자를 위해 굳은살이 박인 농부들의 손이었다면, <구두 한 켤레>에서는 사람이 부재한 굳은살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도, 이 낡은 구두는 마치 훈장처럼 그 이름 모를 주인의 삶을 충분히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
|
|
님은 혹시 전시관에서 미술 작품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보신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마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했을 겁니다. 누군가는 작품이 주는 인상 그 자체에, 누군가는 작품 속 인물들의 관계에, 또 다른 누군가는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의도에 빠져들었겠죠. 이렇듯 미술 작품은 하나지만, 그 자체로 여러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메를로 퐁티가 말한 회화는 ‘세계의 살’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흥미로운 관찰을 했습니다. 그는 회화를 하나의 살아있는 몸과 같다고 여겼는데요. 그는 화가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이 자신의 몸을 통해 탐색한 세계의 깊이와 질감들이 그대로 화폭으로 옮겨져, 마치 그 자체로 살처럼 존재한다고 봤죠. 메를로-퐁티가 캔버스를 '깊이 있는 평면'이라 부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계와 마찬가지로 회화도 여러 층위가 교차하며 서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라는 것이었어요. 마치 우리가 고흐의 그림 앞에 설 때,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 이상의 복잡하고 생생한 감상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
|
|
The Starry Night, oil on canvas, 92.1 cm x 73.7 cm, 1889
|
|
|
고흐는 후기에 이르러 주요한 관심사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창작 초기에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에게 집중했다면, 후기에는 대부분 풍경화나 자화상을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죠. 아를의 노란집에 머무는 기간 동안 고흐는 자연을 감상하는 일에 몰두하며, 자연 속에서 느낀 격렬하고 숭고한 감정을 솟구치는 색채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 밤하늘이 살아 움직이듯 소용돌이치고, 달과 별은 노랗게 진동하며 황홀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 아래 사이프러스 나무와 마을의 집들은 다소 고요하게 잠들어있죠.
고흐는 어느 날 밤, 별을 화폭에 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렇게 마주한 밤하늘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해 보이지만, 고흐는 밤하늘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 풍경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달과 별의 빛도, 그 빛을 받은 나무나 마을도, 그런 풍경을 담은 밤하늘까지도 말이죠.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보이지 않던 각각의 존재들이 서로 만나며 교차하는 순간을 감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이 풍경을 자신이 느낀 감각 그대로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동시에 아를에서 새 출발하는 희망과 위로의 마음을 담았겠죠. |
|
|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고흐가 그린 별과 달과 나무는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것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고흐에 의해 재탄생된 것들이죠. 즉 별의 살, 달의 살, 나무의 살 등에 더불어, 이들을 본 고흐의 몸이 투과된 형태인 셈입니다. ‘고흐의 별의 살’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죠.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살적 교차로 보는 시선은 더욱 확장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밤 풍경의 여러 살들이 고흐의 살과 만나고, 이후 캔버스의 살이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미술관에서 우리의 살과 닿겠죠. 하지만 각자의 살들을 서로 다른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퐁티는 이런 접촉의 끝에는 자아를 잃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1889년 고흐가 보았던 밤 풍경이 현실과 다르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그가 감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
|
|
- Youtube, ,CBS Filmsr, AT ETERNITY'S GATE - Official Trailer - HD (Willem Dafoe, Rupert Friend, Mads Mikkelsen) ,2018 - |
|
|
님은 평소에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잘 알고 계셨나요? 사실 고흐는 미술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차지하는 만큼, 일상적으로도 굉장히 친숙한 예술가입니다. 어지간한 미술 인테리어 제품에서 어렵지 않게 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죠. 이러한 전 세계적 사랑을 받는 만큼, 고흐를 주제로 한 영화들도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2018), <러빙 빈센트>(2017), <반 고흐>(1991), <열정의 랩소디>(1956)와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인데요. 흥미롭게도 이 영화들에서는 고흐의 삶만큼이나 그의 죽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연 소문처럼 정신병에 걸린 환자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찾기 위한 위대한 예술가였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죠.
실제로 고흐는 정신병과 관련된 많은 추측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 황시증(xanthopia)에 걸렸다는 가설입니다. 황시증이란 물체가 원래의 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보이는 증상을 말하는데요. 당시 고흐가 즐겨 마시던 압생트의 독성 성분이 황시증을 일으켰다는 설로도 유명합니다. 고흐는 평소 "노란색은 희망의 색"이라며 노란색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해바라기>, <노란 방> 등 그의 대표작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란색이었죠.
|
|
|
The Yellow House (The Street), oil on canvas, 72 cm x 91.5 cm, 1888
|
|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란색은 미술에서 황금, 태양 그리고 신성함을 의미하며, 우리는 노란색을 통해 따뜻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의 노란색은 이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는 종종 노란색을 남색 계열의 색채와 함께 배치하면서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루곤 했는데요. 이러한 보색 대비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색이기에, 함께 있을 때 심리적 긴장감이나 불안정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책과 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나 죽음이 가까운 말년에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 같은 작품들을 보면, 노란색 속에서도 우울함과 체념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죠.
또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노란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진짜 노란색을 잃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모든 주변 사물들이 소리를 지르는 듯한 감정을 느낀 뭉크 🔗의 <절규>처럼 말이죠. 메를로-퐁티가 말했듯, 우리는 같은 세상을 공유하며 같은 대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마주하면, 그를 배제하고 배척하려 하죠. 이는 고흐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는 노란색이지만, 그렇지 않은 누군가의 ‘절규’는 때때로 우리에게 닿아 예술이 됩니다. 결국 그의 작품들을 배제할 것인지, 단순한 비극으로 치부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예술로 볼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죠.
|
|
|
오늘날, 우리는 고흐가 정말로 황시증을 앓았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가 세상을 노랗게 보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나 그 사실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흐는 항상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세상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희망차고 따뜻한 것이든, 혹은 냉담하며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든, 그는 자신의 지각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고흐가 황시증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우리에게 색다른 질문을 던져줍니다. 고흐의 황시증처럼, 우리에게도 하나씩 각자만의 황시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죠.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세상을 파란색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회색으로 바라볼 수도 있죠.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그런 자신마저도 사랑하며 끝까지 예술로 승화시킨 고흐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독특한 시선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진실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님은 어떠신가요? 님은 자신만의 ‘황시증’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
|
|
오늘의 de tour 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님은 님의 몸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거울 속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도 하죠. 최근에는 SNS의 각종 필터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정'해주면서, 진짜 나와 가짜 나 사이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기도 했고요.
님, 저희 뉴스레터가 최근 다룬 두 명의 이론가가 모두 ‘몸’에 주목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아시나요? 이들은 똑같이 몸을 중심으로 '경계'에 주목했지만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크리스테바 🔗는 우리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배출물에게서 느끼는 혐오감에 집중했어요. 반면 메를로-퐁티는 우리 몸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의 공감과 소통에 주목했죠. 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한쪽은 '밀어내고 싶은 것'을, 다른 쪽은 '함께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셈입니다.
어쩌면 이런 차이가 보여주는 건, 우리 사고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이 아닐까요? 오늘 살펴본 고흐처럼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것이 때로는 새로운 연결의 문을 열어주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님은 이 둘 중 어느 이론이 가장 맘에 들어오셨나요? ' 피드백 하러 가기 ' 버튼을 통해 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
|
- https://www.vangoghmuseum.nl/en/art-and-stories/art/vincent-van-gogh
- https://www.moma.org/
- https://ko.m.wikipedia.org/
|
|
|
|